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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소식

가자지구, 병원도 안전하지 못해

2014.07.30
  • 28일 시파 병원 폭격으로 이미 4번째 병원 공격
  • 가자지구에 있는 국경없는의사회 직원들의 증언
  • 샤티 캠프 폭격 이후 시파 병원에 도착한 부상자의 2/3 아동

가자지구 알시파 병원. 국경없는의사회는 이곳에 수술팀과 의료 장비와 응급 물품을 지원하고 있다.  ©MSF

국경없는의사회는 7월 28일에 있었던 가자지구의 시파 병원 공격을 강하게 규탄하고 있다. 알-쉬파 병원은 가자지구의 주요 위탁병원으로서 국경없는의사회의 수술 팀이 일하고 있는 곳이다. 3주전 이스라엘이 프로텍티브 엣지 작전을 개시한 이후 수천 명의 주민들의 대피소로 이용되어 왔던 이 병원을 겨냥한 폭격은 가자지구의 민간인에게 안전한 피난처가 전무하며 가자지구 내의 응급구호가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시파 병원 외래환자 병동에 폭격이 떨어졌을 때 국경없는의사회의 국제 활동가 한 사람이 건물 내에 있었다. 이 공격으로 인한 부상자는 없었지만, 지난 7월 8일 이후 병원 공격은 이번이 벌써 네 번째다. 지금까지 공격을 받은 다른 병원은 유럽 종합병원과 악사 병원, 베이트 하눈 병원이다.

병원과 병원 인근을 공습 표적으로 삼는 것은 결코 용인될 수 없으며 심각한 국제인도법 위반이다. 상황이 어떻든 의료시설과 의료진은 보호받아야 한다. 그러나 현재 가자지구에서 병원은 더 이상 안전한 피난처가 아니다.

국경없는의사회 팔레스타인 현장 책임자 토마소 파브리(Tommaso Fabbri)

시파 병원 공격 한 시간 후 로켓 한 발이 샤티(Shati)의 난민 캠프를 덮쳤다. 대부분이 어린이들인 부상자들은 시파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국경없는의사회의 가자지구 의료 코디네이터 미셸 벡(Michele Beck)은 “시파에 도착한 부상자의 3분의 2가 아이들이었습니다.”라고 전한다.

가자지구에는 16만 명의 이재민을 비롯한 180만 명의 주민이 비좁고 인구 밀도가 높은 구역에 살고 있다. 국경없는의사회의 운영국장 마리 노엘 로드리그(Marie-Noelle Rodrigue)는 “가자지구 주민은 3면의 벽과 바다에 포위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군이 민간인들에게 집과 인근에서 나가라고 명령을 내리면 이동의 자유도 없고 가자지구 밖으로 대피할 수도 없는 사람들에겐 갈 데가 없습니다. 이들은 사실상 갇힌 상태입니다.”라고 상황을 전한다.

국경없는의사회 같은 가자지구 내 의료 인도주의 단체들도 돌아다니기가 극도로 어려우며 위험한 상황이다. 지난 3주 동안 구급차와 이슬람권 적십자단체인 적신월사(Red Crescent)의 응급요원들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7월 20일 식별 가능한 국경없는의사회 차량에서 고작 몇 백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 공습을 당했다. 같은 날 가자 남부 나세르(Nasser)병원의 숙소에 설치된 국경없는의사회 천막에서 불과 10미터 떨어진 곳에는 불발 미사일이 떨어졌다.

지난 3주 동안 국경없는의사회 팀이 나세르 병원에 갈 수 있었던 것은 단 두 차례였다. 국경없는의사회는 공습이 심한 지역에서 치료가 시급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병원 내 수술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는데, 부상자들은 대부분 여성과 아이들이다.

구호단체들이 스태프와 의료품을 가자지구로 반입하는 일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이집트 국경 지대의 라파(Rafah) 검문소와 이스라엘 국경 지대의 에레즈(Erez)검문소와 케렘 샬롬(Kerem Shalom)검문소는 일부 열려 있지만 폭격의 위험이 있다. 마리-노엘 로드리그는 “사람도 물건도 오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이곳 주민들은 인질이나 마찬가지”라고 개탄했다.

집중 포화로 환자들과 부상자들은 병원에 가기도 어렵다. 보건소 운영도 제대로 되지 못해서 80만 명이 살고 있는 가자 시의 경우 15개 보건소 중 단 4 곳만 열려 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가자 시 시파 병원에 수술 팀과 응급 의료 장비를 지원하고 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그동안 응급 재고품을 가자지구의 북부와 남부의 중앙약국으로 기부해 왔다. 국경없는의사회는 10년 이상 가자지구에서 진료와 수술과 심리치료를 제공해 왔으며, 2009년과 2012년의 가자지구 공격 때도 응급구호 활동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