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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소식

차드: 젖 달라고 우는 소리가 기분 좋은 이유

2024.05.07

이름: 윤호일

포지션: 의사(Medical Doctor)

파견 국가: 차드

활동 지역: 모이살라

활동 기간: 2023년 9월 – 2024년 3월(6개월)


차드 현장에서 윤호일 활동가 ©국경없는의사회

활동가님이 국경없는의사회 소속으로 현장에서 일하고 오신 게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윤호일 활동가 첫번째 이야기 읽어보기). 이번에는 어디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말씀해주세요.

차드 모이살라라는 지방 소도시에 있는 거점 병원에서 일하고 왔습니다. 병원은 차드 보건부 소속으로 내과, 수술장, 소아과, 분만실이 있고, 그곳에서 국경없는의사회가 소아과와 분만실을 위탁 형식으로 운영하고 있어요.

 

저는 소아과에서 일했는데 현지 의사 4명에 저처럼 타국에서 온 활동가 의사들이 3-4명 더 있었습니다. 말라리아 환자가 많아서 말라리아 프로젝트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말라리아 이외의 질병도 모두 진료합니다. 하지만 그중 90%는 말라리아 환자일 정도로 여전히 말라리아가 만연한 상황이고요.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2,3차 병원쯤 되는 곳이라, 보건소에서 전원되어 온 말라리아 중증 환자들을 주로 치료했죠.

차드 모이살라 보건부 병원 정문 ©국경없는의사회/윤호일

그럼 활동하신 지역에서 가장 심각한 의료보건 문제는 말라리아였던 거죠?

제일 심각한 문제는 역시 말라리아죠. 모이살라 소재 병원 내부 프로젝트 규모도 크지만, 병원 외부 프로젝트 규모도 상당해서 말라리아 피크 시즌(6-10월)에는 아이들에게 미리 예방약을 먹이고 모기장을 쓰라는 캠페인도 하고요. 그 외에 홍역이나 영양실조 문제도 있기는 했습니다. 

 

국경없는의사회 활동가들조차 모기장을 치고 예방약을 먹지만 말라리아에 여러 번 걸리는 경우를 봤습니다. 보통 건강한 성인의 경우 중증까지 진행되는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소아 환자들 중에서도 2세 미만이 중증 말라리아 환자가 되는 경우가 많죠. 이 경우 영양실조 등이 겹쳐서 오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고요. 우리나라에도 말라리아가 있긴 하지만, 열대열 말라리아는 없어 중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없어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으셨나요?

제가 진료한 환자 중에 나름 큰 축에 속했던 7세 소년 환자가 있었습니다. 말라리아가 중증으로 진행되어 심한 빈혈을 겪게 되자 병원을 찾아온 건데요. 쇼크나 뇌손상 등 말라리아가 치명적이 되는 유형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아이처럼 중증 빈혈이 온 경우에는 빨리 수혈만 받으면 보통 해결돼요. 수혈만 빨리 받을 수 있으면 금방 증세가 좋아지고 시간을 벌 수 있거든요.

 

그런데 그 아이의 헤모글로빈 수치가 1.8 정도였고(정상 범위는 12-13), 이미 호흡이 곤란한 상태로 병원에 들어왔어요. 7세라 어느 정도 말이 통하니까 제가 ‘괜찮다, 금방 좋아질 거다. 걱정 말아라’고 말해주고 ‘내 말 이해하니?’라고 물으니 아이가 고개를 끄덕끄덕했습니다. 그런데 병원 안 혈액은행에서 이 아이에게 알맞은 혈액을 찾아서 오는데 15-20분 정도가 걸리는데, 그 피가 도착하기 전에 아이에게 심정지가 온 거예요. 제 눈앞에서 단 몇 초 차이로 그 아이가 죽었습니다.

 

제가 의사 생활을 꽤 오래했으니까 환자가 사망하는 걸 꽤 많이 봤잖아요. 영화 같은 걸 보면 ‘XX야 미안하다’하고 탁, 죽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사람은 그렇게 죽지 않거든요. 죽기 한참 전에 의식불명이 되고 여러 단계를 거쳐서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처럼 제 눈앞에서 사람 생명의 불이 확 꺼지는 건 저도 처음 본 것 같아요. 심폐소생술을 한참 동안 했는데 필요한 피는 계속 안 오고, 심박동이 돌아오질 않더라고요.

 

한동안은 감정적으로 꽤 힘들었습니다.

정말 감정적으로 쉽지 않은 상황이었네요.

그곳에 자동차가 없으니까 다들 보통 택시로 기능하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닙니다. 엄마가 아이를 안거나 업고서 가로등도 없는 밤길 20-40 킬로미터 거리를 오토바이 택시로 달려서 오는데, 엄마 등에 업힌 채로 죽는 아이들이 꽤 있습니다. 엄마들이 들어와서 아이를 받아보면 이미 죽은 지 꽤 지난 거죠. 그럴 때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들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시죠?

그런데 다음 날 출근하면 그날의 일이 또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4명의 차드인 의사 제외하고 저 빼고 다른 외국인 의사 활동가들을 보면, 한 명은 아이티인, 다른 한 명은 콩고민주공화국인이었어요. 그들의 고국 사정도 사실 거의 비슷하니까 이러한 상황에 어느 정도 익숙한 것 같다는 인상이었습니다. 

차드 모이살라 활동지에서 동료들과 함께한 윤호일 활동가 ©국경없는의사회/윤호일

비상 대응 상황 속에서 ‘출근하는 직장인’으로서의 루틴이 오히려 도움이 되는 걸까요. 하루 일과가 보통 어땠습니까?

숙소에서 6:50이면 차를 타고 십 분간 이동해서 병원으로 출근했고요. 걸으면 이십분이라 걸어갈 땐 6:30에 출발했습니다. 밤에는 무조건 차량을 이용해야 하고 사전허가도 필요합니다. 저녁 6시 이전에만 혼자 걸어다닐 수 있습니다. 어차피 갈 곳은 별로 없지만, 숙소가 강 바로 옆에 있어서 아침엔 조깅도 하고 산책도 했습니다.

 

병원근무는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고 중간에 점심시간이 2시간 있습니다. 5-6일에 1회 꼴로 밤에 당직도 섰는데요. 밤에 당직을 서면 오후 4시 반쯤 병원으로 가서 필요한 환자를 인계받고 5시부터 근무 후 매일 아침 7시에 있는 회의에서 밤새 있었던 일, 몇 명이 입원했고 사망자가 있었다거나 하는 걸 공유합니다. 그리고 같이 볼 환자들을 회의 후에 추려서 3-5명 정도 같이 경과를 보고 추이를 결정한 후 집에 옵니다. 밤 당직을 서면 다음날은 쉬고요. 그래도 근무 강도가 일전에 갔던 수단의 경우보다 높았습니다. 수단 난민 캠프 안의 유일한 병원에서는 피부병부터 각종 경증 환자도 다 진료했는데 이곳은 중증 환자들이 모이다 보니 환자 수는 그곳만큼 많지 않아도 중증도가 더 높았거든요.

 

생활 환경은, 일단 2월말부터 더워져서 고생을 좀 했는데, 점차 더워져서 5월에는 50도까지 올라간다고 해서 걱정됐습니다. 당직실에 있는 침대 시트와 매트리스도 합성섬유 재질로 만들어져 누우면 전기 장판인가 싶을 정도였고요. 마지막 당직일에는 ‘나는 곧 가지만 여기 계속 있을 동료의사들은 어떡하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려운 얘기를 주로 했는데, 혹시 기쁘거나 보람을 느낀 때는 없으셨나요?

일단 소아 환자들을 본다는 게 저는 좋았어요. 사실 제가 내과 의사라 성인 진료에 익숙한데, 소아 환자들은 상태가 급격히 악화될 수 있는 대신 치료를 잘 하면 그만큼 급격하게 좋아질 수도 있거든요. 믿을 수 없을 정도로요. 밤에 당직 설 때 응급실 신환을 보고 중환자실에서 생기는 일을 해결하는 게 당직의의 의무인데, 당직 때 받는 10명 내외의 환자들은 다 기억이 나요. 그 중에 숨만 붙어있지 다시 살아날 것 같지 않았던 아이들이 당직 서고 하루 쉬고 와보면 나아지다 못해 멀쩡해져 있을 때, 젖 달라고 울고 있을 때, 너무 기분이 좋습니다. 제가 퇴근할 때까지는 의식도 없던 아이들이 다음날 회진을 돌 때 저를 보면 막 우니까요. 말라리아라는 병이 빨리 치료하면 금방 좋아지기도 하거든요. 그때를 놓치면 죽기도 하지만요. 정말 몹쓸 병이죠.

국경없는의사회 활동의 실제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일단 제가 활동한 분야인 소아 중증 말라리아 환자 치료라는 게 들어가는 노력과 비용에 비해 성과가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교통이 안 좋아서 환자들이 병원에도 빨리 못 오는 지역에서 국경없는의사회는 교통비 지원도 해주니까 아이의 양육자들이 필요할 때는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병원에 올 수 있는 것이고요.

 

제가 밤에 당직 설 때 환자 진료와 처방이 끝나면 오토바이 기사들에게 직접 교통비를 정산해주기도 했거든요. 낮에는 사무소에서 돈을 받아가는데 밤에는 사무소가 문을 잠그니까, 제가 직접 돈을 사무실에서 미리 받아놓고 있다가 오토바이 기사에게도, 강 건너 마을에서 환자를 배에 태워온 뱃사공에게도 지불을 하는 것이죠. 오토바이 기사들은 대개 젊은 청년들이에요. 사실 그곳은 직업이라는 게 별로 없고 대다수 염소를 치거나 고기를 잡아 생활해 한국처럼 현찰을 만질 기회가 별로 없는 동네이다 보니 이런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을 하는 젊은 청년들 몇몇과는 나중에 친해져서 인사도 나누는 사이가 됐습니다. 영수증에 서명하라고 하면 어떤 친구들은 펜을 잡아본 적이 없다는 티를 내면서 어색하게 동그라미만 그리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국경없는의사회에서 돈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자원을 투입해서 가장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곳을 꼽아보자면 전쟁터 정도를 제외하고는 이곳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치료를 받은 아이들은 아직 어리고, 이렇게 진료를 받은 수십 명 수백 명의 아이들이 다음 세대가 되어 살아갈 테니까요.

 

사실 말라리아가 얼마나 큰 보건 문제인지 숫자로 많이 배우고 듣고 했지만 가서 직접 보면 놀랍거든요. ‘이렇게 치명적인 병이 이렇게나 흔할 수 있다니’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활동가님의 향후 계획을 알려주세요.

제가 1995년에 의사가 됐으니까 30년 정도를 이미 한국에서 근무했습니다. 그런데 국경없는의사회에서 근무하기 위해서 저 나름으로는 오래 다닌 직장도 그만뒀고, 준비도 오래 했기에 지금 그만둘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국경없는의사회 활동을 할 계획입니다. 한국에서 경험이 많다고 해서 활동지의 상황에 익숙한 것은 아니라서 현장 경험이 필요합니다. 이제 2번의 활동을 통해 저도 많이 배웠고, 이제야 막 아프리카 국가들 내 활동지에서 치료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되는 느낌입니다. 한국 병원들의 진료 행태 같은 것들이 서로 비슷비슷하듯이, 그리고 한국은 멕시코보다는 일본과 비슷하듯이, 그곳 병원들도 돌아가는 방식이나 질병 양상은 공통적인 측면이 있거든요.

 

지금은 집에 와서 너무 좋은데, 지난 경험에 비춰보면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이제 맛있는 음식도 매일의 음식이 되고 다시 활동지가 그리워집니다. 여기서 우리가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사실은 시시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고요. 물론 여기서 일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이지만, 그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보람이 있기에, 그렇다고 믿고 싶기에 다시 나갈 겁니다.

차드 모이살라 활동지에서 동료들과 함께한 윤호일 활동가 ©국경없는의사회/윤호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