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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드: "길에서 많은 시체를 봤습니다" 수단 분쟁 이후 유입된 부상자들의 증언

2023.08.08

4월 중순 수단 내 분쟁이 격화된 시점, 다르푸르 지역에서는 이미 20년 이상 내전과 부족간 폭력사태가 진행중이었다. 수도 카르툼에서 수단 군대(SAF)와 준군사조직 신속지원군(RSF) 사이에 우선 발생한 전투는 다르푸르 전역, 특히 엘 제네이나(El Geneina) 시내 공동체간 갈등을 재점화했다.

격렬한 전투, 부족간 폭력, 민간인 대상 대규모 공격으로 인해 수만 명이 차드 동부 국경지대인 아드레(Adré)로 피란했다. 차드와 수단 사이 국경을 따라 위치한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아드레 또한 식량, 의료 서비스, 기타 필수품에 대한 접근성이 이미 제한적이었던 상황에서 빠른 속도로 대거 유입되는 난민을 수용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경없는의사회 팀은 2021년부터 아드레에서 의료지원을 제공해왔는데, 수단에서 지속적으로 넘어오는 난민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지난 3개월간 현지 보건시설 역량 제고 및 의료 서비스 질적 개선을 위해 활동 규모를 크게 확대했다. 난민 일부는 엘 제네이나에서 이동하던 중 총상이나 다른 부상을 입기도 했다. 최근 몇 주간 수집된 증언에 따르면, 다수의 환자들은 차드로 피난하는 과정에서 엘 제네이나 내 아랍 무장단체들로부터 피해를 입었다고 전했다. 이들은 마살리트(Masalit) 족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공격 대상이 됐다고 한다.

2023년 6월 아드레에서 부상자 치료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국경없는의사회 팀 ©MSF/Mohammad Ghannam

“그렇게 많은 부상자가 올 줄은 몰랐습니다”

5월말-6월초 기간, 서다르푸르(West Darfur) 내 폭력사태가 격화되었다. 하지만 부상자들 중 국경없는의사회가 차드 보건부와의 협력 하에 아드레 병원에 설치한 응급 수술실에 도착한 것은 소수에 불과했다. 

폭발음과 피어오르는 연기 때문에 국경 바로 너머 수단에서 진행중인 전투가 매일 상기될 수밖에 없다. 6월 2일, 총 72명의 부상자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대부분은 총상을 입고 온, 엘 제네이나 남부 마스테레이(Masterei) 및 그 인근 지역 출신이었다. 차드의 군구르(Goungour) 마을에 도착한 이들은 현지 보건부와 국경없는의사회로부터 지원을 받고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하지만 당시 다르푸르에 소재한 많은 의료시설이 약탈, 파괴당하고 인력 및 자원난을 겪으면서 수백, 수천명이 넘는 다르푸르 내 부상자들이 필수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는 보고가 있었다.  서다르푸르의 주도인 엘 제네이나와 아드레를 연결하는 주 도로 역시 당시 폐쇄된 상태였다. 

6월15일, 두 달 간 엘 제네이나에 발이 묶여 있던 이들이 마침내 아드레로 탈출하자 모든 게 급격히 변했다. 그 날 하루에만 아드레 병원에는 261명의 부상자가 접수됐다. 당시 아드레에서 유일한 국경없는의사회 외과의사이던 파피 말로바(Papi Maloba)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하루를 시작했다. 병원에서 회진을 돌고 수술실에 들어갈 환자를 선별한 후, 팀과 함께 어린 소년의 수술을 집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여기저기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빨리 나와보세요! 환자들이 도착하고 있어요!’라고 소리치는 게 들렸죠. 저는 동료들에게 환자를 개복한 상태로 내버려둘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수술실은 조용했지만 밖에서는 엄청난 소동이 벌어졌죠. 차드-수단 합동군이 차량에 환자를 태워 병원으로 데려오고 있었고, 국경없는의사회 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부 환자는 친척에게 업혀오거나 당나귀 수레에 실려왔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혔습니다. 복부, 흉부, 사지, 둔부, 등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환자들이었습니다. 우선 부상의 중증도를 구별 및 진단한 뒤, 치료가 급한 순서대로 수술을 집도해야 했습니다. 

 

순식간에, 두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병원은 캠프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직도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는 환자들을 어디에 둘지 알 수가 없었죠. 차단되었던 도로가 열리고 협상이 성공해 엘 제네이나에서 환자  유입이 가능해지면 보다 더 많은 환자들이 아드레 병원으로 올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준비가 안 되어 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렇게 많은 부상자가 한 번에 들이닥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죠. 우리는 다음 날이면 상황이 좀 더 안정되어 대처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상황은 더 나빠졌어요. 다음 날, 부상자가 거의  400명 신규 유입되었죠.”_파피 말로바 / 국경없는의사회 외과의사

아드레 병원을 찾은 부상자들이 치료를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MSF/Mohammad Ghannam

아드레 주민들은 이러한 대규모 부상자 유입사태에 대응해 새로 도착한 사람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주고 치료를 제공하려 애썼다. 공간 마련, 텐트 설치, 추가 지원이 필요했다. 마을 주민들은 환자와 피난민들에게 식량도 제공했다. 프랑스 비정부기구인 프리미에 우르장스(Première Urgence Internationale)가 생명이 당장 위급한 상황은 아닌 소위 “그린 케이스( green case)” 환자들을 지원하는 가운데, 아드레 병원 수석의사와 소아과의는 보건부 직원들과 협력해 응급 수술실을 지원했다.

수술실은 총 두 개가 있었어요. 하나는 크고 장비가 잘 갖춰진 반면에 다른 하나는 작고, 필요한 장비가 모두 구비되어 있지는 않은 상태였죠. 그래서 두 곳을 왔다 갔다 하며 환자를 치료해야 했어요. 가령 큰 수술실에서 개복술을 마치고 나면, 그곳이 정리되는 동안 작은 수술실로 옮겨가 흉곽배액술이나 괴사절제술 같이 상대적으로 간단한 시술을 진행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온종일 일했습니다. 정말 고됐죠. 나중에 차드 정부쪽에서 외과팀을 지원해준 것이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_파피 말로바 / 국경없는의사회 외과의사

3일간 아드레 병원 유입 부상자 858명

이번 아드레 병원의 환자 유입은 규모 면에서 국경없는의사회 팀이 목격한 최고 수준이었다. 6월 15일에서 17일 사이 전쟁 부상자 858명이 유입되었는데, 이 중 387명이 16일 단 하루에 유입된 수치다. 이후 응급실에는 하루 평균 46명의 부상자가 들어왔다. 6월 25일부터 7월 말까지, 하루 평균 유입 수치는 10명 혹은 그 미만으로 줄어들었다.

환자 대부분은 특히 복부, 등, 다리 부위에 다수의 총상을 입은 상태였다. 남성이 가장 많았으며, 여성과 아동은 보다 적은 비중을 차지했다. 최연소 환자는 두 달 된 아기였으며, 최고령 환자는 70세였다. 환자 중 7명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환자의 47퍼센트는 그린 케이스에 해당해 보행이 가능했다. 약 49.5퍼센트는 “옐로우 케이스”로 분류되었는데, 이는 치료가 필요하긴 하지만 전반적인 건강 상태가 양호한 편에 속해 예후 악화의 우려 없이 치료를 대기할 수 있는 정도를 의미한다. 3.4퍼센트는 긴급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위중한 “레드 케이스”로 분류되었다. 개방성 골절로 인해 아드레 병원에서 집도가 어려운 정형외과적 수술이 필요한 이들은 아베셰(Abéché) 소재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목에 총상을 입었던 환자가 아베셰 소재 병원에서 치료받은 후, 꺼낸 탄알을 보여주고 있다. ©Mohammad Ghannam/MSF

“그린”과 “옐로우” 케이스의 높은 비율은 그나마 상태가 어느 정도 양호했던 이들만이 차드로의 여정을 감당하고 국경없는의사회의 의료시설에 접근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보다 위중한 상태였던 이들은 다르푸르에 남겨지고 만 것이다.

6월15일과 18일 사이, 62명의 임신부가 구타와 각종 폭행으로 입은 총상과 부상 치료를 받았다.

제가 처음으로 호출되어 보게 된 환자는 임신 6개월차인 임신부였는데, 복부와 가슴에 총상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총알 파편 하나가 자궁에 박혀 매우 우려스러웠죠. 안타깝게도 아기는 사망했지만, 환자는 생존했어요. 그렇게 많은 임신부들이 사지와 복부에 부상을 입은 것이 충격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엘 제네이나에서 넘어오면서 겪어야 했던 끔찍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아이를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총알이 날아다니는 와중에 도망을 치거나 공격 혹은 강간을 당한 상황을요.”_클레망스 슈바트(Clémence Chbat) / 국경없는의사회 조산사

일부 예외가 있지만 아드레 병원 부상자들은 대부분 차드와 수단 내 비아랍계 다르푸르 공동체인 마살리트 소수민족이었다. 이들이 폭력사태를 피해 아드레로 이동한 이유 중 하나는 분쟁 발발 전부터 아드레에 이미 대규모 마살리트 지역사회가 존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들이 전한 이야기는 엘 제네이나 마살리트 사람들의 경험만을 반영할 뿐, 서다르푸르나 엘 제네이나의 전체 인구가 겪었던 일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일부 소수민족 겨냥 폭력사태를 증언하다

다수의 환자는 차드로 대피하던 중 엘 제네이나 내 아랍계 무장단체들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며, 자신들이 공격의 대상이 된 이유는 마살리트 소수민족이라는 정체성 때문이라고 전했다.

수단군과 신속지원군 사이 전투가 격화되자, 엘 제네이나는 순식간에 혼돈 상태가 됐습니다. 정부와 경찰이 도시에서 자취를 감추는 바람에 마살리트와 아랍계 집단 사이 폭력과 강도사태가 불거지기 시작했죠. 처음엔 엘 제네이나를 떠날 생각은 없었어요. 저는 딸 두 명, 어머니, 네 명의 자매들과 함께 근처에 있는 알 마다레스(Al Madares) 내 집단 임시 거처로 향했죠. 하지만 거기도 안전하지 않았어요. 계속해서 폭격과 총격이 일어나고 있었죠. 아랍 무장단체가 임시 거처 시설의 민간인들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어요. 한동안은 렌틸콩과 옥수수 가루를 먹으며 버틸 수 있었지만, 한달이 지나자 그마저도 다 떨어지고 없었죠. 당시 제공받을 수 있는 의료서비스나 의약품은 전혀 없었어요. 곧이어 아랍 무장단체는 우리가 있던 임시 거처를 공격하기 시작했고요. 그들은 우리에게 이 곳은 너희 국가가 아니니 지금 당장 차드로 떠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어요. 그러더니 그들이 갑자기 몇 명 남자들을 데리고 나가 길가에서 총으로 쏘는 걸 봤어요. 그 누구도 시체를 묻어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 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_에이치(H)*, 26세 (*익명은 알파벳 1개로 표기)

차드-수단 국경지대 지도 ©MSF

다수의 증언이 알 마다레스, 알 자발(Al Jabal), 13구역(Area 13), 알 자마릭(Al Jamarik) 등 인근 지역에서 유사하게 발생한 위협과 반복되는 공격사태, 식수나 물자를 가지러 나간 민간인들을 겨냥한 저격수들이 있었음을 알린다.

아무도 집 안팎을 드나들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깨끗한 식수를 구하러 계곡이나 샘으로 향할 때마다 저격수들이 그들을 공격했어요. 처음엔 마살리트 무장 단체도 저항하려 했지만, 버틸 수가 없었죠.”_엔(N), 25세

다른 환자들 또한 차드로 향하는 도로와 수십개의 검문소에서 반복되는 소수민족 겨냥 폭력사태에 대해 증언했다.

차드로 향하는 길에 수차례 검문소에서 가로막혔습니다. 우리에게 어느 부족 출신인지 물어보더라고요. 그들은 마살리트 사람들을 겨냥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알 푸르(Al Fur) 사람인데, 검문소에서는 어느 부족 출신인지 속일 수 없습니다. 그들은 생김새로 마살리트 사람인지 아닌지 구별할 수 있거든요. 그들이 마살리트 사람들에게 차에서 내리라고 하는 걸 목격했지만,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지는 모릅니다. 우리는 차를 타고 출발했거든요.”_엠(M), 35세

6월 18일, 저는 무장한 아랍인 운전사에게 300,000수단파운드(미화 약 500달러)를 주고 아내와 아이들을 아드레로 태워달라고 했습니다. 운전사는 제가 있으면 우리가 마살리트 사람인 걸 알게 될 거라며 제가 함께 가면 가족들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같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6월 25일, 휴대폰 신호를 잡으려고 엘 제네이나 북부 언덕으로 나갔을 때, 계곡쪽을 내려다보니 최소 20구의 시체가 보였어요. 신에게 부디 제가 살아서 가족들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6월 28일 마침내 아드레로 떠났고 검문소를 지나칠 때마다 운전사가 “이 사람 우리 사람입니다”라고 말한 덕분에 아무 탈 없이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대가로 운전사에게 거금을 지불해야 했죠. 많은 사람들이 단지 마살리트라는 이유로 살해당해 차드로 오지 못했습니다.”_케이(K), 44세

수주동안 이어진 분쟁과 폭력사태 이후, 서다르푸르 주지사인 하미스 아바카르(Khamis Abakar)의 살해 사건, 점차 악화되는 치안, 엘 제네이나 동부에 위치한 아르다마타(Ardamatta) 내 수단군 캠프로 접근하려던 사람들을 겨냥한 대학살 등 여러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 엘 제네이나의 마살리트 인구 대부분이 6월 중순 차드로 피란을 시도했다.

6월 14일 수요일 저녁, 이제 도저히 제가 살던 곳에 더 머물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가족을 데리고 약 200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엘 제네이나 북동부에 있는 아르다마타로 향했습니다. 알 나셈(Al Naseem) 지역에 도착하자, 갑자기 건물 옥상에서 우리를 향해 총이 발포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겁에 질려 사방으로 뛰어다녔죠.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대학살이었죠. 모두가 살기 위해 도망다니기 바빠 사망자 혹은 부상자를 돕거나 옮길 수 없었어요. 저는 제 아내와 한 살짜리 아기를 데리고 소규모 무리와 함께 도망쳤습니다. 우리는 마침내 알 마다레스에 이르렀고, 계속해서 움직였습니다. 서쪽으로 향하던 중 아랍 무장단체들을 만나는 바람에 돈과 휴대폰을 빼앗겼죠. 여덟 명의 제 아이들이 아르다마타 군대 캠프에 있는데, 연락이 어려워 잘 지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부디 안전하길 바랄 수 밖에요.”_에이(A), 40세

사방이 개방되고 평평한 지대라 숨을 곳 하나 없었습니다. 제 친구 여덟 명이 아르다마타 내 군 캠프로 향하는 도중에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죠. 제 사촌도 허벅지에 총상을 입어 현재 아드레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_에이(A), 28세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어요. 떠나는 건 집단적인 결정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단군의 보호를 받으려고 걸어서 아르다마타로 피란했죠. 하지만 그 과정에서 검문과 총격을 당했어요. 몇 명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길에 누워 있는 걸 목격했죠. 남은 유일한 방법은 서쪽으로, 아드레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들 차드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_엔(N), 25세 

차드가 유일한 피난처였지만 그로 향하는 여정은 극히 위험했다. 환자들은 차드에 이르기 위해 도보로 가거나 차량을 타거나, 통과를 보장해줄 수 있는 운전사에게 거금을 지불하는 등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야 했다고 전했다. 다수의 환자들은 검문소에서 약탈, 폭행, 강간, 살해를 당할 수 있는 위험에 더해, 피란민들을 겨냥한 무장 남성들의 총격까지 무릅써야 했다고 전했다. 환자들의 여러 증언에 따르면, 슈크리(Shukri)가 여정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였다.

여자들과 아이들이 새벽 4시 알 자마릭 지역으로 모였습니다. 다같이 차드로 가기 위해 서쪽으로 이동할 계획이었죠. 곧이어 남자들도 합류했습니다. 일부는 이동하는 길에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총과 차량을 가지고 있었죠. 하지만 슈크리라는 곳을 지날 때쯤 우리는 공격을 당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지인들에게 살해당했어요. 우리 사람들이 파리떼처럼 쓰러졌고 완전히 난장판이었습니다. 그때 일부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총 쏘는 이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거나 그들 앞에 있던 사람들이 대신 총을 맞았기 때문이었죠. 우리 일부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그뿐입니다.”_엘(L), 36세

슈크리에서 소규모 무리가 우리를 가로막고 바닥에 앉으라고 했습니다. 최후심판의 날 같았죠. 저는 공포에 질려 신에게 살려달라고 빌었어요. 그들은 ‘노예들은 일어나라. 살고 싶으면 수단을 떠나라. 수단은 아랍인들의 것’이라고 말했어요. 그 말은 들은 우리는 뛰어가기 시작했고, 무장한 남자들이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쏘아댔습니다. 저는 그때 오른발에 총을 맞았어요. 피가 흘렀지만 계속 걸었습니다. 그러다 제 하얀색 터번을 벗어 제 발을 칭칭 감았죠. 너무 피곤하고 어지럽고 머리가 아팠지만, 걷는 걸 멈출 수 없었습니다. 길을 잃은 것 같았어요. 무리를 따라가는 양처럼 저도 사람들을 그저 따라갔죠. 제 인생에 그렇게 목이 말랐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나마 남은 물은 딸을 위해 남겨두었죠. 주변엔 온통 죽음이 보였습니다. 믿기 힘들겠지만, 죽음에서도 냄새가 납니다. 저는 그 냄새를 맡았죠. 길에서 많은 시체를 봤습니다. 곧 나도 이 시체 무리에 합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요.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국경에 닿았어요. 그때 국경없는의사회의 흰색 SUV 차량이 보였고, 저는 그걸 타고 아드레 병원으로 향할 수 있었죠. 거기서 치료와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_씨(C), 40세

인도적 위기 악화 

현재 약 200여명 부상자들이 아드레 병원에 남아있다. 그 중 일부는 회복하기 위해 후속 치료, 특히 물리치료를 장기간 받아야 한다. 6월 말, 국경없는의사회는 의료 서비스 역량 및 질적 제고를 위해 엑스레이실, 멸균실, 2개의 수술실이 구비된 공기 주입식 병원을 설치하여 의료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국경없는의사회의 차드 아드레 공기 주입식 병원 설치

 

부상자 급증과 함께 엘 제네이나로부터 신규 난민도 아드레 병원으로 유입되었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주로 여성과 아동으로 이루어진 130,000여 명의 난민이 최근 몇 주 동안 해당 지역에 도착했다. 아드레 병원 유입 인구가 갑작스럽게 증가하면서, 이미 현지 인구 수요 파악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의료 서비스, 임시 거처, 식량 구호품, 식수위생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도적 수요가 크게 늘고 있다. 

평소에는 35-50명 정도의 아동을 소아과 병동에서 치료했는데, 지금은 200-250명의 아동을 치료하고 있습니다. 그 중 80퍼센트가 합병증을 동반한 중증 급성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죠.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우선순위는 보건센터와 난민 캠프 내 소아 질환 및 영양실조 의료 서비스를 확대해 증상이 악화되기 전에 아동 환자들에게 치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_야벳 니온지마(Japhet Niyonzima) / 국경없는의사회 의료팀 리더

현지 당국과 유엔난민기구는 7월 중순 차드 동부 내 신규 수단 출신 난민 수를 260,000명으로 추정한다.

아드레에 소재한 난민 경유 센터 ©Johnny Vianney Bissakonou/MSF

국경없는의사회가 의료지원을 시작한 아르쿰(Arkoum)을 포함한 여러 지역에서 경유 및 신규 캠프가 추가 설치되고 있다. 지난 20년간 수단에서 피란해온 400,000명의 난민이 이미 이번 분쟁 격화 전부터 차드 내에 거주하고 있었다. 차드인이든 난민이든 상관없이 가장 취약한 계층을 위한 장기적 인도적 지원이 대규모로 필요해질 것이다. 기존에 식량난을 겪고 있었으며 식수 및 의료 서비스 접근성이 현저히 낮았던 지역에서 최근 수단 분쟁의 여파에도 대응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