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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힝야 난민위기 5년, 로힝야 난민 5인의 증언

2022.08.25

국경없는의사회는 미얀마를 떠나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난민캠프에서 살아야 했던 지난 5년의 삶에 대해 5인의 로힝야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각기 5, 15, 25, 45, 65세인 이들의 이야기는 이 난민캠프에서 살아온 로힝야 3세대를 대표한다. 이들은 모두 국경없는의사회에서 치료받은 환자이다.

1. 다섯 살 쌍둥이의 이야기

5살 쌍둥이의 어머니 타예바 베굼(Tayeba Begum)이 남편, 아이들과 콕스바자르 난민캠프 안에 위치한 가족의 임시 거처 앞에 서 있다. ©MSF/Saikat Mojumder

미얀마 고향을 떠날 때 이 쌍둥이 자매 누르 안키스(Nur Ankis)와 누르 바하르(Nur Bahar)는 6개월 아기였어요. 옷만 걸친 채로 아이들을 들고 뛰었습니다. 2017년 우리가 도망치기 전에도 이미 젊은이들은 끌려가 고문 당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아들은 인도로 떠났죠. 아직도 거기 있어요.

 

아기들을 데리고 정글과 진흙길을 지나 방글라데시로 오는 길은 험난했어요. 방글라데시 국경에 도착해서도 쉴 곳이 없어 비가 많이 오면 나무 아래 앉아 도움을 기다리곤 했죠. 살기 위해 아무거나 보이는대로 먹었는데, 쌍둥이 딸은 뭘 먹이려 할 때마다 토했어요. 도착했을 땐 약이 없어서 아이들이 병을 오래 앓았어요.

 

콕스바자르(Cox's Bazar)에 도착하고 며칠 후 천막과 대나무로 만든 임시 거처에 살게 됐습니다. 이제 우린 여기 난민캠프에서 생활하고 있고, 쌍둥이는 다섯 살이 됐어요. 5년 동안 어렵게 살았죠.

 

여기선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요. 식량 지원도 부족하고, 아이들 옷 입힐 걱정, 교육시킬 걱정을 합니다. 돈이 없어서 필요한 걸 해줄 수 없기 때문에 때로 내가 덜 먹고 남는 음식을 팔기도 해요.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반쯤 굶으면서. 안 그러면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사줄 수가 없으니까요.

 

인도에 사는 아들이 2-3개월에 한 번씩 전화를 하지만 나는 휴대전화가 없으니 다른 사람 전화기로 통화합니다. 몇 년간 보지 못해서 아들이 보고 싶고, 미얀마 고향도 그리워요. 평화를 간절히 바랍니다. 정의가 살아나 우리가 시민권을 얻게 되면 미얀마로 당연히 돌아갈 겁니다. 우리 고향이니까요. 여기 계속 머물러야 할 수도 있고, 다른 나라로 가야할 수도 있겠죠. 괜찮습니다. 하지만 정의 없이는 미얀마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2. 15세 안와르의 이야기

15살 안와르(Anwar)는 앞날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MSF/Saikat Mojumder

내 이름은 안와르(Anwar). 미얀마에서 온 15살 학생입니다. 미얀마에서 살던 곳을 도망쳐 나와 방글라데시 잠톨리 난민캠프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오후 군대가 우리 마을에 와 집을 불태웠고, 친척과 이웃들은 목숨을 잃었어요.

 

안전한 곳을 찾아 먼 여행을 했습니다. 방글라데시에 오기까지 거의 12일 동안 낯선 길을 따라 뛰고, 걷고, 헤엄치기도 했어요. 오는 길에 시신을 보기도 했습니다.

 

당시 저는 학생이었어요.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좋은 성적을 받는 모범생이었지만 이제는 필요한 책을 얻거나 공부를 계속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곳 난민캠프에서는 초등교육까지만 받을 수 있어요. 다른 배울 기회는 공동체 선생님들이 나서서 아이들을 모아 가르쳐주실 때 뿐입니다. 선생님들은 열과 성을 다해주시죠.

 

제 친구들은 가족을 부양해야 해서 수업에 못 오기도 합니다. 교육을 받아야 우리 공동체가 발전하고, 우리 세대가 할 일을 할 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제 꿈은 의사가 되어 공동체에 필요한 일을 하는 겁니다. 어릴 때부터 의사들이 최선을 다해 사람들을 돕는 걸 봐왔어요. 이제 이런 꿈이 실현될 일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수업에 가서 친구들을 만나면 즐거워요. 우리는 함께 공부하고 놀면서 즐겁게 지내려고 노력합니다.

 

난민캠프의 삶은 쉽지 않아요. 아버지가 버는 돈은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하지 않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안전의 위협을 느끼기도 해요.

 

전 세계 제 또래의 학생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누리기 바랍니다. 저와 다른 로힝야 친구들에겐 그럴 기회가 없으니까요.

3. 25세 나비 울라의 이야기

25살 나비 울라(Nabi Ullah)와 그 아내 나시마 카툰(Nasima Khatun)은 어떻게 하면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MSF/Saikat Mojumder

미얀마에서 우리는 농부로 일하면서 추수한 걸로 먹고 살 수 있었어요. 돈을 벌 필요가 없었죠. 군대가 우리 마을에 왔을 때 저는 고문당하고 의식을 잃었어요. 이웃들은 목숨을 잃고 마을은 불탔죠. 실종된 사람들도 있고요. 당장 도망가야 해서 몇 가지 약품만 챙겨 가족과 함께 미얀마를 탈출했죠.

 

국경을 넘으니 방글라데시 정부가 거처와 식료품을 제공해줬습니다. 그 다음 이 난민캠프로 보내졌죠. 미얀마가 그립습니다. 저는 아들 하나와 딸 둘이 있는데, 아들은 여기 국경없는의사회 병원에서 태어났고, 이제 두 살이 되어갑니다. 딸들은 미얀마에서 태어났어요. 아내는 지금 아이를 임신 중입니다.

 

난민캠프엔 열병, 장염, 후두염 등 여러 질병이 많아요. 열이 날 때면 목이 붓고 숨쉬기도 어렵죠. 한번은 구급차로 쿠투팔롱(Kutupalong) 병원에 실려가 3일 동안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던 적도 있습니다. 몸이 불편하면 국경없는의사회로 갑니다. 아이들이 아플 때도 그렇고요. 아이들 미래가 걱정됩니다. 교육을 받지 못하면 미래가 더 어려워질 테니까요.

 

우리는 모두 고향이 그립습니다. 미얀마 생각이 날 때면 뭘 먹고 싶은 생각도 없어져요. 우리를 도와준 방글라데시 정부가 정말 고맙지만, 고향에 돌아가고 싶습니다. 늘 어떻게 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미얀마가 시민권을 인정해주고, 집과 땅, 문서들을 돌려줘야 갈 수 있겠죠. 우리는 권리가 보장되는 곳에 가고 싶으니까요.

4. 45세 하시물라의 이야기

45살 하시물라(Hashimulla)는 콕스바자르 국경없는의사회 병원 침상에서 5년전을 회상한다. ©MSF/Saikat Mojumder

2017년 미얀마에서 많은 로힝야가 체포되고 목숨을 잃었을 때, 방글라데시로 왔습니다. 8일간 공중폭격이 일어났고, 마을이 차례로 불탔습니다. 하루는 모두가 잠든 새벽 4시쯤 총탄이 비처럼 쏟아져 모두가 공포에 떨었습니다. 아침에 수로엔 시신이 떠다녔어요. 살아남은 사람들도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모두 겁이 나서 닥치는대로 도망가기 시작했죠.

 

하지만 2017년 전에도 납치 당한 남자들과 강간 당한 여자들이 많았습니다. 군대는 우리 가축을 빼앗아 갔고요.

 

방글라데시로 오는 길에 목숨을 잃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방글라데시 국경에 있는 섬에 다다라 방글라데시 정부가 제공한 차량으로 콕스바자르로 왔고, 쿠투팔롱으로 이동해 이곳 난민캠프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여기서 산 지 5년째입니다. 2년 전에 병에 걸렸죠. 어지러움과 가슴 통증을 느꼈고, 의식을 잃고 쿠투팔롱에 있는 국경없는의사회 병원으로 이송됐습니다. 16일간 심장 치료를 받고 마침내 회복했습니다. 이곳엔 여러 질병이 많은데, 우리가 5년째 살고 있는 집은 이곳에 도착했을 때 임시로 만들어진 거처입니다. 이제 캠프 내 이동에도 제약이 많습니다.

 

정부가 식료품을 지원해줘서 고맙지만 그것으론 부족해서 생선을 사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중엔 미얀마에서 어부나 농부로 일했던 사람도 있죠. 저도 그물을 팔고 아이들과 물고기 잡으면서 잘 살았어요. 지금은 돌아가고 싶어도,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니 어떻게 갈 수 있겠어요? 나는 그저 미얀마에서 존엄성을 지키며 권리가 필요할 뿐입니다.

5. 65세 모하마드 후세인의 이야기

모하메드 후세인(Mohamed Hussein)은 미얀마 내무부 장관실에서 38년간 근무했다. ©MSF/Saikat Mojumder

내가 고등학교를 나온 게 1973년입니다. 당시 로힝야는 헌법상 지위가 인정되어 정부에서도 일할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이수했다는 것이 확인되면 바로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 식민지령에서 독립한 1948년 이후 정부는 우리를 시민으로 인정해줬습니다. 그땐 아무도 차별받지 않았는데, 1978년 인구 통계 이후 모든 게 변했어요. 누가 미얀마 시민이고 누가 방글라데시 시민인지 규정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체포됐죠. 나는 목숨의 위협을 느껴 도망쳤지만 나중에 미얀마 정부가 우릴 다시 받아줬어요. 방글라데시 정부와 협정을 맺으면서 우리가 돌아오면 권리를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죠. 우리를 점점 궁핍하게 만들면서 박해가 시작된 겁니다.

 

1982년 시민법으로 저희의 미얀마 시민권을 빼앗아 갔어요. 그래도 그땐 로힝야가 외국인으로나마 한 국가 내에서 살 수 있었고, 로힝야 공동체 뉴스도 방송될 수 있었죠. 군부가 권력을 잡으면서 우리 라디오 송출은 중단됐습니다. 우리가 정말 외국인이면, 왜 옛 헌법은 우리를 외국인이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고등교육을 받을 수도 없고 이동에도 제한을 받았어요. 군대는 우리가 불교신자와 갈등을 일으킨다고 비난했죠. 유명 로힝야 인사들이 불교 탄압 혐의로 체포되거나 벌금형을 받았어요. 통금 시간이 정해지고 다른 사람의 집을 방문했다고 고문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침묵하게 됐죠.

 

매년 새로운 명령이 떨어졌고, 이를 지키지 못하면 체포됐습니다. 그땐 투표는 할 수 있었지만, 2015년 투표권조차 빼앗겼죠. 조상들이 살아온 땅에서 우린 더는 투표도 못하게 된 겁니다. 침입자라고 불리기까지 했죠. 부당한 대우가 계속되니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2017년 어느 날 아침 총소리를 들었어요. 밤에는 집 근처 군부대에서 진짜 총을 쐈고요. 다음날 아침 로힝야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군대가 우리 마을에 들어오자 사람들은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뛰다 보니 여기 방글라데시에 도착했습니다. 여기까지 살아서 온 게 행운이죠. 방글라데시는 우리를 위해 많은 일을 해줬습니다.

 

처음 여기 도착했을 때는 희망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는 게 어렵습니다. 이동할 때마다 수색을 받고, 다른 곳에 사는 자녀들을 마음대로 방문할 수도 없습니다. 제 자녀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는다는 것도 걱정스럽습니다. 아이들이 여기 머물게 되든 미얀마로 돌아가게 되든, 교육없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 잠이 안 옵니다.

 

캠프 내 국경없는의사회에서 당뇨병과 고혈압 치료를 받지만, 신장병 치료는 못 받습니다. 나가서 치료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캠프 안에서 받게 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죽기 전에 고향 땅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내 소원은 미얀마에서 마지막 숨을 쉬는 거지만, 될지 모르겠어요. 미얀마에서 시민으로 인정받으면 동등하게 대우받겠죠. 공부도 하고 투표도 하고 국회에서 우리 목소리를 낼 수도 있고요.

 

하지만 지금은 권리뿐 아니라 국적조차 박탈당한 상태입니다. 전 세상에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도 다른 이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며, 권리를 누리며, 평화롭게 살 수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