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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소식

고문 피해자들을 돕는 국경없는의사회 센터에서 전한 환자들의 증언

2018.06.27

#1 공포에서 희망으로 - 멕시코시티의 국경없는의사회 고문 피해자 지원센터에서 수집한 실베레의 증언

Albert Masias

멕시코시티 국경없는의사회 고문 피해자 지원센터에서 증언하는 실베레

콩고인 실베레 G(Silvère G, 26)는 현재 멕시코시티에 살고 있다. 그는 6살 아들을 포함해 온 가족을 뒤로하고 콩고공화국 브라자빌을 떠났다. 훤칠한 키에 무용인의 몸매를 가지고 있는데다 피부까지 검은 그는 멕시코 사람들과는 확연히 달라 보인다. 하지만 그의 고독감은 다른 데서도 온다. 과연 언제쯤 안전하게 고국으로 돌아갈지, 돌아갈 수나 있기는 한지 생각해 보면 앞이 깜깜하다. 게다가 탈출 전에 겪었던 끔찍한 일들도 그를 괴롭힌다. 브라자빌에서 당한 고문 때문에 자살 충동에 시달리던 실베레는 멕시코시티에서 고문 • 학대 피해자들을 치료하는 국경없는의사회 종합지원센터(Comprehensive Care Centre, CAI)에 찾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멕시코에서 마침표를 찍은 실베레의 여정은 12,000km 넘게 떨어져 있는 브라자빌에서 2015년 10월에 시작되었다. 당시 실베레는 개헌으로 영구 집권을 시도하려는 사수 은게소(Sassou Nguesso) 대통령에 저항하는 유명한 시위에 참여했다. 은게소 대통령은 벌써 31년째 콩고 정치를 장악하던 중이었다. 정부군은 강압적으로 시위대를 진압했다. 실베레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군은 우릴 향해 총을 쐈어요. 아이든 여성이든 가리지 않았죠. 친구를 도와주려고 가는데 군과 경찰이 그의 옆구리에 총을 쐈어요.”

이후 실베레는 군사 교도소에 끌려가 몇 달간 잔인한 고문을 당했다.

“그들은 밤중에 사람들을 잡아갔어요. 날마다 우릴 때렸어요. 저는 팔도 부러지고, 여기저기 상처들도 감염되고, 머리도 부었어요. 그렇게 죽는 줄 알았어요.”

실베레가 목숨을 건진 건 순전히 운이었다. 실베레의 가족을 알고 있던 교도소장이 그의 탈출을 도운 것이다.

“그분은 저더러 죽은 사람 시늉을 하고 있으라고 했어요. 그러면 구급차로 저를 빼내서 중간에 다른 사람을 만나게 해주겠다고요. 저는 너무도 큰 충격과 고통 속에서 말도 제대로 못했지만 어쨌든 우린 그렇게 했어요. 구급차를 타고 30분을 이동한 뒤에 저는 택시 옆에 내리게 됐어요. 거기서 저를 기다리던 누나를 만났죠. 누나와 저는 한 어부의 도움으로 킨샤사(민주콩고 수도)로 건너갔어요. 저는 거기서 병원에 입원해서 한 달을 보냈어요.”

무용수로서 킨샤사에서 훈련을 받았던 적이 있는 실베레는 그곳에 지인들이 좀 있어서 무용단에 들어갈 수 있었다. 브라자빌로 돌아가 가족들을 찾아가려고 했지만, 경찰이 그를 찾고 있다는 경고를 받았다. 경찰은 실베레에 대한 처벌로 그의 부모님 집을 샅샅이 뒤졌다. 그때부터 실베레는 당분간 고국에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춤에 매진했다. 실베레가 속한 무용단은 두바이와 브라질로 순회 공연을 다녔지만, 아무리 멀리 나가도 그가 겪었던 일들은 실베레를 계속 따라다녔다. 브라질에 갔을 때 실베레는 이제 민주콩고든 어디든 콩고공화국과 외교 관계가 있는 나라로는 갈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실베레는 멕시코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멕시코 공항에 내린 저는 뭘 해야 될지 몰랐고 스페인어도 전혀 할 줄 몰랐어요. 그렇게 아무것도 먹지 않고 거기서 이틀을 보냈어요. 그러다가 아이티에서 온 한 남자 분이 저를 도와주셨어요, 그렇게 경찰의 도움을 받아 쉼터로 가게 됐어요. 저는 앓아 누워 움직이지도 못했고 계속 코피가 났어요. 죽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고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그러다 마침내 국경없는의사회의 도움을 받게 됐죠.”

CAI에 왔을 때 실베레는 불면, 악몽, 공포, 불안, 우울 증상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게다가 만성 두통, 어깨 통증, 거식증까지 있었고, 이런 증상들 때문에 가슴 떨림을 호소하기도 했다. 멕시코에 도착해 복잡한 망명 신청 절차를 거치는데 언어 문제로 의사소통도 제대로 못하고 신체적 증상도 많았기 때문에, 실베레는 어마어마한 우울과 자살 충동으로 괴로워했다. CAI에서 실베레는 의사 • 심리학자의 치료를 받고 사회복지사의 지원도 받았다. 심리적 외상을 다루는 전문가를 만나 상담을 받기도 했다. 실베레가 멕시코 사회에 잘 적응하도록 돕기 위해 CAI 직원들은 그에게 사회생활에 필요한 지침을 주고 취직 활동도 지원했다. 실베레는 자신과 같이 고국의 폭력과 고문을 피해 탈출한 중앙아메리카 출신 환자들과 함께 센터에서 지냈다.

이후 실베레는 서서히 에너지를 되찾고 용접 수업도 들었다. 2018년 4월이 되자 실베레는 이제 CAI를 나와도 되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 언어 문제가 있지만 천천히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는 있고, 사실 불어를 할 수 있다는 것도 큰 힘이 된다. 만약 캐나다가 실베레를 받아들여준다면 그는 좀더 자신감 있게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을 것이고, 좀더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2  “드디어 이 고통이 끝나는구나 싶었어요” - 이주 루트에서 운영되는 국경없는의사회 지원센터에 찾아온 라일라(가명)의 증언

저는 14살 때부터 고통 속에 살아왔어요. 그런 폭력을 당한 소녀라면 진작에 망가져야 했겠지만 저는 끈질기게 이겨 냈고, 마침내 저와 같은 활동가였던 남편을 만나 사랑에 빠졌죠. 우리는 행복한 나날을 보냈어요… 그러다가 둘째를 가졌는데 임신 9개월 때 그들이 와서 저를 가두고는 마구 때리기 시작했어요. 저는 감옥 안에서 조산아를 낳았어요. 바닥에 누운 갓난아기를 보는 순간 저는 정신을 잃었고, 얼마 있다가 풀려났어요.

저처럼 갇혀 있던 제 남편은 정신적인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남편이 풀려나게 하려고 저의 아버지까지 나섰는데, 그들은 아버지마저 잡아 가두고 심하게 구타했어요. 불치병을 앓던 아버지는 감옥에서 한 달 반을 보내시다가 결국 돌아가셨어요. 풀려난 남편은 갑자기 공격적인 사람으로 변했어요.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았어요. 남편이 불안한 상태였지만 우리는 계속 노력했어요. 4년 뒤 그들은 남편을 또 잡아갔고, 다음에 또 찾아와서 저까지 잡아갔어요.

그때부터 저는 전과 다른 고통 속에 빠졌어요.

그들은 제 남편을 데려와 제 앞에서 그를 강간하기 시작했어요. 그러고 나서 제 남편 앞에서 저를 강간했어요. 우리 두 사람 인생을 완전히 바꿔버린 순간이었죠. 

그 후 남편은 저와 제 가족을 거부했어요. 그렇게 저는 남편을 잃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까 그 후에도 계속해서 잡혀 갔다고 하더라고요. […]

나중에 그들은 제 아이들까지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저는 막대기를 들고 다 죽여버리겠다고 소리를 지르며 방에 쳐들어갔어요. 작디 작은 제 아들이 그들에게 강간을 당하며 소리지르는 게 다 들렸어요. 그런데 제 딸아이들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아이들이 소리를 못 지르게 입을 막은 거였어요. 제 비명소리를 들은 그들은 다 흩어졌어요. 그때 저는 아이들을 데리고 얼른 도망가야 한다는 걸 알았죠.

여기 도착했을 때 저는 정말 절박했어요. 재정 보증이 전혀 없어서 집을 구할 수도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저와 아이들을 부양하려고 절박하게 일자리를 찾아 헤맸어요. 그때 동네 한 여자 분이 제게 가정부 일을 해줄 수 있겠냐고 제안을 하셨어요. 저는 빈털터리였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어요. 약속 장소에 나갔더니 그분과 함께 남자 2명이 있더라고요. 같이 차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는 거예요. 저는 최대한 저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지만 제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총을 꺼내 저를 위협했어요. 저는 저항했지만 그들은 펜 같은 날카로운 걸 제 목에 들이댔어요. 온몸이 떨렸어요. 저는 온몸이 마비되는 듯했지만 머릿속으로는 계속 빠져나갈 궁리를 했어요. 저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는데 몸을 움직일 순 없었어요. 그들은 저를 차에서 끌어내서 강간하기 시작했어요. 그들 중 한 명이 제 몸에 하얀색 물질을 뿌렸는데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어요. 그렇게 그들은 가버렸죠. … 무엇보다도 저는 아이들이 걱정이었어요. 저는 아이들을 찾으러 나갔고, 밤새 울었어요. 주변에 도움을 구했더니 곧장 국경없는의사회를 찾아가라는 조언을 들었어요.

저는 곧바로 핫라인으로 전화를 걸었어요. 강간을 당한 이후로 아직 72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때였죠. 다음날 아침 약속을 잡았어요. 진료소에 들어서는 순간, 드디어 이 고통이 끝나는구나 싶었어요. 국경없는의사회는 우릴 도와주려고 모든 것을 다해 줬어요. 모두가 우릴 도와주려고 애썼어요. 의사들, 산부인과 의사들, 심리학자들, 사회복지사들까지요. 저는 아이들도 데려가서 치료받게 했어요. 최소한 심리적 지원은 받을 수 있었어요.  […]”

#3 “다시 사람 대접을 받는 기분이었어요” - 아테네에 있는 국경없는의사회 고문 피해자 지원센터에서 수집한 압둘의 증언

Albert Masias

시리아 전쟁 전까지 법학과 학생이었던 압둘 라만(가명). 압둘은 처음에는 정부군에, 다음에는 이슬람국가(ISIS)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 뒤 집을 나와 도망쳤다.

시리아 전쟁 전, 저는 알레포 대학 법학과에서 공부하고 2009년에 졸업해서 2년간 변호사 일을 했어요. 전쟁 후 결혼해서 두 아이를 얻었죠. 가족들과 함께 살아가는 제 삶은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했어요. 그러다가 일련의 사건이 벌어지면서 사람들의 삶이 파괴되기 시작했어요. 우리는 씻을 수 없는 상실의 아픔을 겪어야 했죠. 저는 아내와 아이들을 모두 잃었고, 저 자신도 부상을 당했어요. 두 번이나 잡혀갔어요.

처음에 잡혀갔을 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가로 • 세로 2미터 공간에 60명 정도가 있었어요. 그들은 사람들의 한 팔, 한 다리를 지지대에 묶어 놓고는 두 다리에 염소를 뿌리고 바늘로 찔렀어요.
거기서 풀려난 뒤에 저는 그리스에 들어가 안전한 곳으로 가야겠다는 새로운 꿈을 품었어요. 저는 치료를 받아야겠다는 희망을 품고 떠났어요. 제가 잃어버린 것 중 아주 작은 거라도 다시 찾으려고요. 하지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저는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어요. 유럽 국가에 들어왔으니 이제 마땅한 권리를 누릴 수 있겠지 싶었어요. 사람들이 말하길 유럽은 권리의 땅이라고들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건 전혀 없었어요. 제가 정신적인 문제가 있든지 없든지, 필요한 약과 진통제를 얻든지 못 얻든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더라고요. 여기서 우린 그저 서류에 불과한 것 같아요. 서류가 준비되면 떠날 수 있지만 그때까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아요.

제가 그 모든 절망을 딛고도 이렇게 살아 있는 건 국경없는의사회 덕분이에요. 그들은 환자인 저를 친절하게 저를 치료해 줘요. 저는 여기서 특별한 지원을 받고 있어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가족을 잃은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국경없는의사회 분들은 제게 삶의 의욕을 북돋워 주려고 애쓰고, 지금까지 이렇게 제가 모든 상황을 견딜 수 있도록 도와줬어요. 덕분에 다시 사람 대접을 받는 기분이 들었죠. 나도 뭔가 권리를 가진 사람이라는 기분이 들었어요.

하지만 제 꿈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어요. 유럽에 들어온 뒤로 제 꿈들은 다 사라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