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위치

현장소식

방글라데시: “그날 저는 밤새 울었습니다” … 로힝야 난민의 증언

2018.06.11

국경없는의사회 간호사와 함께 쿠투팔롱 임시 캠프 사이를 걸어가고 있는 자심 ⓒNatasha Lewer/MSF

자심(Jasim)은 과거 미얀마에서 국경없는의사회 스태프로 일했으나 지금은 난민이 되어 방글라데시에 머물고 있다.

미얀마에서 얼마나 살기가 어려운지 상상도 못하실 겁니다. 우리는 늘 차별 대우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막혔습니다. 교육도 마찬가지죠. 불교 신자인 아동에게는 교육이 제공되지만 무슬림을 위한 교사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별도의 교사를 두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우리가 벵갈리 출신이니 거기서 배워야 한다고들 말했습니다. 2012년 이후 로힝야족은 시험에 통과해도 대학에 가지 못했습니다.

저도 교육을 별로 못 받았습니다. 입학을 거절당했거든요. 대신 저는 방글라데시에 와서 영어를 배우고 다시 미얀마로 돌아갔습니다. 구호 단체에서 번역가로 일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러다가 2012년에 마웅다우에 있는 국경없는의사회 라카인 북부 프로젝트에서 번역가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했습니다.

얼마 후 저는 국경없는의사회 소속 정신건강 감독으로 일했고 그 다음에는 HIV 파견진료 단원, 그 이후에는 지역사회 보건단원들을 훈련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러던 중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 다섯 아이 중 첫째가 14살인데 2014년에 브로커에게 납치를 당해 인신매매업자에게 팔렸습니다. 34일 동안 제 아들은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배에 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태국에 도착해 제게 전화를 걸었고, 아들의 몸값으로 미화 2,000달러를 요구했습니다. 돈을 내지 않으면 아들을 어선에 태워 보내 버리겠다면서 영영 아들을 못 볼 거라고 협박했습니다.

제 아들은 태국에서 붙잡혀 있었습니다. 하루에 물 0.5리터를 세면과 식수로 써야 했고, 먹을 거라곤 소량의 쌀과 작은 물고기 한 마리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약한 상태로 만들어 도망치지 못하게 했습니다. 경비원들은 총을 갖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서 죽었는데 시체는 정글에 던져 버리면 그만이었습니다.

저는 가까스로 돈을 마련했고 제 아들은 마침내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말레이시아에서 안전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미얀마에 있는 동안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했습니다. 미얀마 정부와 무슬림 사이에 문제가 많았거든요. 당국은 우리를 계속 뒤쫓았고, 우리 집에 찾아간 것만 해도 세 번입니다.

2017년에 또 문제가 터졌습니다. 우리 집이 강에서 굉장히 가까운데요. 20명 넘게 폭력을 당해 다친 것을 본 겁니다. 그 장면을 보고 났더니 더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9월에 식구들과 함께 미얀마를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우리는 나프 강(미얀마-방글라데시 경계)까지 가려고 작은 시내를 건너 검문소를 지나 가시덤불까지 들어갔습니다. 때는 한밤중이었고 주변에는 치안군이 많이 깔려 있었습니다.

우리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한 시간 반 동안 가시덤불 사이를 아주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우릴 알아차리면 바로 총을 쏠 테니까요.

우리는 20명 정도가 탈 수 있는 작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넜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배에 탄 사람은 100명도 넘었죠. 그러다 보니 배의 양쪽 끝은 물 밖으로 불과 0.5 인치 나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드디어 샤 포리르 드윕 섬에 도착했습니다. 사실 방글라데시는 한 달 만에 50만 명이 들어올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방글라데시 사람들과 당국은 우리를 진심으로 환영해 주었습니다. 강물까지 들어와 우리가 짐을 운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다음날 우리는 쿠투팔롱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도로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정말 힘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다들 짐을 들고 있었고, 아이들은 울며 보챘고, 먹을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도로는 혼잡했고 사람들은 도로 위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날 하룻동안 저는 살면서 처음으로 비참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여기서 죽겠구나’ 싶었죠. 그날 저는 밤새 울었습니다.

마침 난민캠프에 제 친척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거처를 얻을 수 있었죠. 집은 너무도 좁았지만 실내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최소한 도로에서 잘 일은 없었으니까요. 그 다음에는 한 달간 방을 빌렸고, 나중에는 우리 거처를 직접 지었습니다.

캠프 생활은 쉽지 않습니다. 너무 혼잡하고 사방이 오염돼 있습니다. 다들 필요한 것을 얻지 못하고, 원하는 대로 머물거나 떠날 수도 없습니다. 치안도 문제입니다. 납치와 살인이 벌어지는데 정작 누가 그러는 건지 알 수도 없습니다. 가장 큰 걱정은 아이들 교육입니다. 캠프 안에서는 정식 교육 기관이 없어서 아이들 미래를 망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제 아내는 항상 옛날 생각을 합니다. 2년 전에 미얀마에서 집을 지으면서 전 재산을 거기 투자했거든요. 상황이 좋아지면 돌아가고 싶은데, 지금은 아무도 돌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그곳을 탈출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우리가 어떻게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본 문서에 언급된 환자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으로 대체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