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위치

현장소식

방글라데시: 로힝야 난민들의 이야기

2018.02.23

미얀마 라카인에서 일어난 폭력사태를 피해 2017년 8월 이후로 68만8000여 명의 로힝야 난민들이 방글라데시 남동쪽 콕스 바자르로 들어왔다. 그 전에도 여러 위기를 피해 이미 수천 명이 같은 길을 택했다. 로힝야족은 미얀마에서 이슬람 소수 민족으로 살면서 시민권 등 각종 권리를 누리지 못했다. 난민들 중에는 기존의 방글라데시 캠프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도 있고, 이번 인도적 위기에 대응하고자 방글라데시 당국이 새로 마련한 임시 정착지로 들어간 이들도 있었다. 아래는 그 여정에 함께한 난민들의 이야기이다.

끝나지 않는 여정 | 알리 아흐메드

잠톨리 임시 정착지에 살고 있는 로힝야 난민 알리 아흐메드(80세)

알리 아흐메드(80세)는 잠톨리 임시 정착지에 살고 있는 로힝야 난민이다. 그가 살던 곳은 라카인 내에서도 약 5천 가구가 모여 있는 부티다웅이었다. 알리 아흐메드가 방글라데시에 도착한 것은 2017년 9월 첫째 주였다. 이번까지 포함해 지난 40년 사이에 세 번이나 난민 신세가 되어 방글라데시에 온 것이다. 6년여 동안 3곳의 캠프에 머물렀고 미얀마로 두 번이나 되돌아갔다. 아들 여섯과 딸 한 명이 있었는데, 2017년 로힝야를 겨냥한 폭력사태 속에 두 아들을 잃었다. 이제는 고인이 된 아내는 부부가 처음 방글라데시로 피신해 있을 때 아들 둘을 낳았다. 이런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알리는 호기심 많은 청년이었다. 수년간 랑군(오늘날 양곤)에 있는 호텔에서 요리사로 일했는데 가족들이 그리워 라카인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첫 번째 여정

1978년 2월, 제 나이 마흔 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가족은 구타와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내와 두 아이를 데리고 도망쳤습니다. 도망치다가 랑군에 살 때 찍은 오래된 사진들을 잃어 버렸습니다. 제가 진짜 아끼던 사진들이었는데 이동하던 길에 강에 빠뜨리고 말았죠. 방글라데시에 들어온 후에는 우키아의 한 정착지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3년 후에 전에 살던 부티다웅으로 송환되었죠. 버스와 배로 우릴 돌려 보냈습니다. 고향에 돌아가서는 전에 살던 곳에 다시 집을 지었습니다. 예전 집은 다 무너졌거든요. 나무로 된 방 네 칸짜리 집을 짓고 주변 땅을 일구기 시작했습니다. 얼마간 그렇게 평화롭게 지냈는데 서서히 또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따금씩 소도 도둑 맞았고 우리도 체포되곤 했으니까요.

두 번째 여정

1991년 들어 또다시 상황이 나빠져 우리는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4년간 강제 노역을 했었어요. 버마 사람들 이야기를 좀 했다는 이유로 군에서 저를 잡아갔습니다. 저는 제 아내, 두 아들과 며느리들, 손주 1명을 데리고 마을을 떠났습니다. 방글라데시까지 오는 데 꼬박 일주일이 걸렸습니다. 나흘간 숲에 있다가 나프 강가로 갔어요. 그러고 나서 3일이 지나서야 방글라데시에 도착했죠. 이번에 머문 곳은 쿠투팔롱이었어요. 다른 식구들은 라카인 여기저기로 피신해 있었습니다. 1994년에 집에 돌아가기 전까지는 전혀 그들과 연락하지 못했어요. 쿠투팔롱 생활은 괜찮았습니다. 캠프에 약 1만8000명이 있었죠.

세 번째 여정

집에 돌아가서 처음에는 좋았습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 2002년에 접어들자 또다시 우리는 수시로 잡혀가 구타를 당했습니다. 마음대로 다니지도 못하게 했기 때문에 집 밖으로 3km 이상은 이동하지도 못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나쁜 소식들이 들려왔습니다. 다시 방글라데시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수시로 했습니다. 2014년에 폭력적인 사건들이 일어나자 우리는 다시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린 여기 사람이 아닌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최근에 일어난 폭력사태로 집이 불타 버렸고 제 두 아이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금 여기 잠톨리에 있는 식구는 제 아들 넷과 딸 하나를 포함해 총 아홉 명입니다. 방글라데시에서 그렇게 큰 문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기 때가 돌아오면 이곳 상황이 더 나빠질 겁니다. 자리를 옮기기도 어렵겠죠. 땅이 너무 미끄러워질 테니까요. 다시 미얀마로 돌아가야 할까 봐 겁이 납니다. 하지만 부디 우리들의 권리를 존중 받았으면 합니다.

마지막 여정 | 보쉬르 울라

Anna Surinyach/MSF

보쉬르 울라(25세)는 아내, 어머니, 세 자녀와 함께 이제 막 방글라데시에 도착한 로힝야 난민이다. 사브랑 진입 지점에서 그의 막내딸 페룬가다가 국경없는의사회 직원에게 예방접종을 받고 있다.

보쉬르 울라(25세)는 미얀마에서 떠나 와 이제 막 방글라데시에 도착한 난민이다. 그는 8월 말 로힝야 난민 탈출이 시작된 후로 5개월도 더 지난 2018년 1월 28일에 방글라데시 해안에 도착했다. 보쉬르는 부티다웅 안에서도 약 50가구가 살고 있던 마을에서 왔다. 그는 아내 선다라(20세), 어머니 두투(60세), 그리고 후사인 아라(3세), 부쉐라(5세), 페룬가다(1세) 등 세 자녀와 함께 이곳에 왔다. 방글라데시에 도착한 다음날, 보쉬르 가족은 반도 남쪽에 있는 사브랑 진입 지점에 도착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이곳에서 아동의 영양 상태를 살펴보고, 새로 온 난민들의 건강 상태를 체크하며, 예방접종을 실시한다. 41명이 사브랑에 도착했는데, 그때까지 일주일간 새로 들어온 사람이 전혀 없었다. 사람들은 1000명~1200명 정도가 나프 강을 건널 배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 이후로 며칠 사이에 수천 명이 방글라데시에 도착했다.

엄습하는 불안감

언젠간 폭력이 다 끝나겠지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기다리던 좋은 소식은 끝끝내 들려오지 않더군요. 한 달, 두 달을 기다렸는데도 상황이 변하지 않자 우리는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군인들 눈에 띄기라도 하는 날엔 구타를 당했습니다. 그들은 제게 강제 노역을 시켰습니다. 저는 꼼짝없이 한 곳에 머물러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군인들은 마땅한 이유도 없이 사람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렇게 저는 8일 동안 한숨도 못 잤습니다. 우리 마을에 500명 정도가 있었는데, 벌써 일부는 방글라데시에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여비를 마련하려고 가진 것들을 팔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도망 가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결심

저는 방글라데시에 친척도 없고 전에 여기 살아 본 적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이모 두 분과 할아버지는 미얀마에 계시죠. 그분들도 오시려고 했지만, 여비를 구하려면 소와 염소를 다 팔아야 하기 때문에 못 오고 계십니다. 우리는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 이상은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배 타기 전에 숲에서 이틀을 기다렸다가 강가로 나왔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데 1인당 40,000짯(한화 약 3만 원)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소지품은 전부 집에 두고 왔습니다. 우리 모두 건강상 큰 문제는 없지만 여기까지 오는 길은 정말 너무도 힘들었습니다.